세계적인 경영 컨설턴트이자 런던 경영대학 교수인 찰스 핸디는 지난 2001년 출간해
베스트셀러가 된 「코끼리와 벼룩」(생각의 나무)에서 가까운 미래는 대기업을 상징하는 코끼리와
수많은 벼룩들이 공생하는 세상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움직이는 데 많은 에너지 소모가 필요한 코끼리는 체중을 줄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고,
코끼리에 소속됐던 많은 ‘직장형 인간’들은 ‘창업형 인간’ 즉 벼룩으로의 변신을 서두르게 될
것이다.
일본의 저명한 경제평론가 하세가와 게이타로(長谷川慶太郞)는 ‘창업형 인간’의 출현을 경제학적
관점에서 예상한다. 그는 최근 도쿄 자택에서 가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세계는 큰
전쟁이 사라지고 디플레이션의 시대가 될 것”이라며 “이러한 시대에는 기업들이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감량을 실시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따라서 개인은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전문가의 자질을 갖추거나 ‘창업형 인간’이 되는 길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은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만큼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하다.
LG경제연구원은 지난 3월25일 발표한 ‘청년 일자리의 질이 악화되고 있다’는 보고서에서
“최근 2∼3년간 청년(15∼29세) 실업률이 6∼9%로 1990년대 초중반에 비해 약
2%포인트 높아지는 데 그쳤으며, 청년실업률이 전체 실업률의 배 수준에 달해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오래 전부터 나타난 국제적 현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는 한국 역시
하세가와가 말한 ‘디플레이션의 시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에서 청년실업 해소를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미래학자들의 예측대로라면 나아질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주위 환경이 바뀌지 않는다면
개인으로서는 환경에 적응하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창업형 인간’은 달라진 사회 환경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선택이다.
‘창업형 인간’은 결코 회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21세기에는 조직에 속해 있는
직장인이라도 ‘홀로 서기’가 가능한 인간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과 비슷한 사회 현상을 보이고 있는 이웃 일본에서는 이미 ‘창업형 인간’들이 인큐베이터
속에서 양산되고 있다. 세계적인 경제·경영 컨설턴트인 오마에 겐이치(大前硏一)가 교장을 맡고
있는 ‘어태커즈 스쿨’(
www.attackers-school.com)은
민간 차원에서 운영되고 있는 ‘창업형 인간’ 양성소다.
도쿄 치요다(千代田)구에 위치한 이 학교에는 장차 라면가게를 차리려는 40대 샐러리맨,
미용실을 차리려는 30대 주부에서부터 대학을 갓 졸업하고 IT 관련 프리 에이전트를 꿈꾸는
20대 청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모여 ‘창업형 인간’으로의
변신을 꾀한다. 사업모델 구축 강좌의 한 장면.
요즘 일본에서 유행하는 사누키 우동집 창업을 꿈꾸고 있는 다니구치 히로시(谷口弘·30)는
다국적 스포츠 브랜드인 나이키의 사업 모델을 모방한 맥주 사업모델을 만들어 오마에 교장과
수백명의 수강생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나이키는 기획과 마케팅 전략 등 두뇌에 해당하는 핵심 부문만 본사에서 맡고 생산은 전 세계의
공장에 위탁해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사업모델을 갖고 있다. 다니구치는 이 사업모델을 모방해
생산을 1백% 외부에 위탁하는 맥주 브랜드를 가상으로 만들어냈다. 브랜드명도 교장의 이름을 본
딴 ‘Oh! My Beer!’ 다.
오마에 교장은 자신의 이름과 비슷한 맥주를 보고 박장대소를 하며 시원하게 한잔 들이킨다. 이어
총평을 내린다. 핵심역량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아웃소싱하는 것은 사업체의 몸집을 가볍게
만들 수 있어 매우 효율적이라는 호평이다.
이 학교에서는 사업모델 구축강좌 외에도 전략 시뮬레이션 강좌, 세무·회계 강좌 등을 개설해
놓고 있다. 일본에서는 작은 음식점 하나 여는 데도 사업모델이나 전략을 따지는 ‘창업형
인간’이 돼야 성공할 수 있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에도 한때 ‘창업형 인간’들이 우후죽순처럼 출현한 시기가 있었다. 90년대 후반 광풍처럼
몰아친 벤처 창업 붐 때의 일이다. 그러나 불과 몇 년도 못돼 그 열기는 차갑게 식고 말았다.
대학 졸업 뒤 한 번도 직장 생활을 한 적 없이 10여년간 줄곧 IT 관련 프리 에이전트 일을
해오고 있는 공황기(43)씨는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창업형 인간’들이 나왔지만 대부분 준비가
안 된 가짜들이었다”며 “전문성만 갖췄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씨는 자신과 비슷한 입장의 프리 에이전트 10여명을 네트워킹해 대형 금융회사의
전산망 구축 프로젝트를 맡아오고 있다.
그러나 ‘창업형 인간’으로서의 삶도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다. 조직을 떠났을 때 적지 않은
상실감이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아무런 소속도 없이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책임감이 뒤따른다.
‘벼룩’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독창성’을 꼽은 찰스 핸디의 조언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남보다 뛰어나려 하지 말고 남과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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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2004년 04월 12일 733호 /
2004.04.14 10:30 입력 / 2004.04.14 10:49 수정